세상사는 이야기

28년의 시간, 월드컵 다시 만난 멕시코

그살장 2026. 6. 17. 09:25

 

연재 웹소설 | 아빠의 청춘, 그리고 월드컵

28년의 시간, 다시 만난 멕시코

다이내믹 코리아, 상처를 넘어 성장하다
🕗 오후 8시 30분

내일은 2026년 6월 17일이다.

북중미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의 두번째 경기가 있는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뉴스를 보던 지아가 불쑥 물었다.

"아빠, 내일 우리 멕시코랑 하잖아!"

기대에 찬 목소리였다.

"멕시코 홈경기장이라는데, 우리 이길 수 있을까? 학교에서 애들이랑 같이 보기로 했단 말이야."

벨라이언의 입가에 픽, 웃음이 번졌다.

화면 속에서는 결전을 앞둔 멕시코시티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경기장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28년 전, 벨라이언이 20살 대학생이던 시절 프랑스 월드컵에서 만났던 첫 상대 역시 멕시코였다.

"아빠가 대학생 때였어. 그때도 우리는 프랑스 월드컵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만났단다."

"진짜? 그때는 이겼어?"

지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곁에서 장난감을 만지던 지안이도 고개를 들었다. 벨라이언은 과거의 시간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그해 여름, 축구 대표팀은 국민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 1998년 6월, 극장 같았던 180초의 기억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팀.

온 국민이 TV 앞에 모여 손을 모으고 있던 전반 28분.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하석주 선수의 왼발을 떠난 강력한 프리킥. 공은 수비수를 맞고 굴절되며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대한민국 월드컵 출전 사상 '최초의 선제골'.

거리마다 터져 나오는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우리도 월드컵에서 1승을 거둘 수 있다는 환희가 전국을 휩쓸었다.

하지만—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데는 고작 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반 31분, 멕시코의 라몬 라미레스에게 깊은 백태클을 시도한 하석주에게 주심이 지체 없이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헐...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빠? 한 명 없이 뛴 거야?"

지아가 아빠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벨라이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결국 체력이 떨어져서 내리 3골을 내주고 1-3으로 졌지. 꽁지머리를 한 김병지 골키퍼가 온몸을 던졌지만 역부족이었어."

벨라이언은 그날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

TV 앞에 쭈그려 앉아 이를 악물던 열네 살의 자신.

어머니가 건네주신 보리차도 마시지 못한 채, 양발 사이에 공을 끼우고 수비수를 뛰어넘던 멕시코 쿠아우테목 블랑코의 얄미운 '개구리 점프'를 보며 주먹만 불끈 쥐고 있었다.

수적 열세에 빠진 한국 팀은 철저히 농락당했다.

이후의 기억은 더 씁쓸했다.

네덜란드전 0-5 대패. 월드컵 대회 직후 이어진 차범근 감독의 쓸쓸한 퇴장. 그것이 당시 대한민국 축구의 서글픈 현주소였다.


"그럼 이번에도 지면 어떡해? 멕시코 홈이잖아."

걱정스레 묻는 지아를 보며 벨라이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아야, 28년 전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야."

1998년의 한국 축구는 '악바리 근성'과 무조건 앞으로 걷어차는 '롱볼 축구'가 전부였다.

선수들의 피지컬과 지구력에만 의존하던 시절.

권위적인 선후배 관계와 기합 문화가 버젓이 잔존하던 때였다.

목표는 오직 하나.

'본선 1승.'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32개국에서 48개국 체제로 확대된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이제 대한민국은 10회 연속 본선 진출을 이뤄낸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강이다.

체계적인 빌드업 축구를 구사하며, 손흥민 같은 선수들이 개인기와 기술력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과거의 뼈아픈 패배들은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는 거름이 되었다."

이것은 비단 축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98년 IMF 위기 속에서 절망하던 대한민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실패를 철저히 복기하고, 체질을 바꾸고, 글로벌 스탠다드를 받아들이며 눈부시게 성장했다.

폭력과 강압이 사라진 자리에 개성과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지아와 지안이가 숨 쉬듯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움과 당당함은, 지난 28년간 치열하게 살아남아 혁신을 거듭해 온 '다이내믹 코리아'의 확실한 증거였다.

🕚 밤 11시 00분

아이들을 재우고 서재에 홀로 앉았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고요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모니터 위로는 내일 열릴 멕시코전 프리뷰 기사들이 흐르고 있었다.

28년 만에, 하석주의 눈물과 블랑코의 개구리 점프에 분루를 삼켜야 했던 그 멕시코의 심장부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시 들어간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지금의 선수들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들의 플레이를 즐길 줄 아는 세대니까.

노트북을 천천히 덮으며, 벨라이언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대학생였던 자신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동안, 나라도, 축구도 참 멋지게 성장했다고.

내일 아침, 휘슬이 울리면 펼쳐질 완전히 새로워진 대한민국의 플레이가 벌써부터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