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균열

왕국의 분열 왕국 이후 — Episode 01

그살장 2026. 6. 29. 11:09
왕국 이후 — 1화: 왕국의 균열
왕국 이후 — Episode 01

왕국의 균열

균열은 소장 한 장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금이 가 있었을 뿐이다.

장르: 법정 스릴러 / 비즈니스 드라마 약 6,200자
오전 09:14 · 서울 서초구 가사법원

접수 창구 위로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번호표를 뽑는 손이 없었다. 평일 오전, 가사법원 1층 민원실은 그날도 고요했다. 슬픔과 분노와 체념이 쌓여 만들어진 특유의 고요함이었다.

서윤아는 혼자였다.

짙은 네이비 코트, 굽 낮은 단화, 핸드백 안에 서류 봉투 하나. 변호사도 동행인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오늘만큼은, 이 걸음만큼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직접 내딛어야 했다.

창구 직원이 봉투를 받아 내용물을 꺼냈다. 서류를 훑는 눈이 잠깐 멈췄다. 상단에 찍힌 피고의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현준.

넥스트엔진홀딩스 창업자 겸 대표이사. 국내 비상장사 최대 기업가치 보유자. 게임 한 편으로 아시아를 삼킨 사람. 크로스파이어의 시대를 열었고, 메타버스의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서윤아의 남편.

이 서류 한 장이 그의 왕국에 처음 난 공식적인 균열이 된다. 그걸 안다. 두렵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접수 완료되셨습니다."

직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서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봉투의 영수증을 받아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법원 밖으로 나오자 11월의 햇살이 얼굴을 때렸다.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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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52 · 강남구 삼성동 넥스트엔진홀딩스 본사 37층

강현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전화 화면을 보고 거절 버튼을 눌렀다. 박정우 대표 변호사. 자신이 선임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번호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37층 유리 너머로 서울이 펼쳐져 있었다. 한강이 보였다. 저 멀리 롯데타워가 하늘을 찌르고, 헬리콥터 한 대가 낮게 지나갔다. 왕국의 전경이었다. 23년 전 이 도시 어딘가의 반지하 오피스텔에서 낡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청년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소장이 접수됐겠지. 지금쯤.

그는 의자를 돌려 창문을 등졌다. 책상 위에는 서류 더미가 있었다. 아시아 IP 라이선스 계약서, 다음 달 이사회 안건 초안, 신작 개발 로드맵. 그 옆에 작은 액자 하나. 오래된 사진이었다. 스물네 살의 자신과 스물두 살의 서윤아가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그는 액자를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CFO 최민석이었다.

"들어와."

최민석은 들어오면서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가 조용히 문을 닫을 때는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다는 뜻이었다.

"접수됐습니다."

강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전 9시 14분입니다. 서초 가사법원.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 소장." 최민석은 태블릿 화면을 내밀었다. "언론 쪽으로 이미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후 전까지는 터질 것 같습니다."

강현준은 잠시 눈을 감았다. 3초. 5초. 그리고 떴다.

"이사회 임시 소집. 이번 주 금요일."

"이유는요?"

"경영권 보호 조치 사전 검토. 안건은 내가 직접 잡는다. 외부에는 정기 일정으로 알려."

최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대표님. 저는 그냥... 괜찮으시냐고 여쭤봐도 될까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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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01:37 · 여의도 법무법인 이수 대표 집무실

이수현은 점심을 거른 채 서류를 읽고 있었다.

변호사 14년 차. 가사 전문.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나온 뒤 이 바닥에서 쌓은 것은 오직 패소의 기억이었다. 이길 수 있는 사건만 맡는 변호사가 있었고, 이길 수 없어도 맡아야 하는 사건을 맡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녀는 후자였다.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편이었다.

서윤아의 파일은 두꺼웠다. 아니, 두껍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두꺼운 파일 안에 담긴 것이 문제였다.

사건 기초 개요 — 내부 검토용
원고서윤아 (48세, 전 넥스트엔진 이사)
피고강현준 (49세, 넥스트엔진홀딩스 대표이사)
청구 내용이혼 및 재산분할
혼인 기간2012년 3월 ~ 현재 (12년)
분쟁 자산비상장 지분 (추정 기업가치 35조~68조 원)
기여도 주장30~40% (창업 초기 공동 기여 포함)
예상 분할 금액6,000억 원 ~ 2조 원 이상 (감정 결과에 따라 변동)

이수현은 파일을 덮었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강현준의 사무실 창에서도 같은 강이 보일 것이다. 같은 강을 보며 두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여도 30퍼센트. 맞다. 증명만 할 수 있다면. 이 사건의 전쟁터는 법정이 아니라 회계법인이다.

전화가 울렸다. 서윤아였다.

"변호사님. 접수 끝냈어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이수현은 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가 가장 많이 지쳐 있다는 걸 14년이 가르쳐줬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알아요." 짧은 침묵. "이길 수 있을까요?"

이수현은 잠깐 망설였다. 법조인의 습관대로 신중한 말을 골랐다.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정당한 걸 인정받는 게 목표죠. 그건 할 수 있습니다."

전화 너머 서윤아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걸로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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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04:19 · 광화문 법무법인 JW 박정우 대표 집무실

박정우는 통화를 마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소송 수임 22년. 대형 기업 분쟁 전문. 그동안 다루었던 사건들 중 이것만큼 구미가 당긴 사건은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비상장사 기업가치 산정. 이 사건에서 모든 것이 여기서 결정된다. 35조냐, 68조냐. 그 사이 어딘가의 숫자 하나가 판결이 되고, 판결이 역사가 된다. 국내 비상장사 재산분할 사상 최대 기록. 자신의 이름이 그 판례에 붙는다.

이수현. 상대는 그녀다. 그 여자는 지는 법을 모른다. 져본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고도 다음 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박정우는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매직펜을 들었다. 그리고 크게 썼다.

특유재산 / 기여도 / 기업가치

이 세 단어가 전쟁의 지형도였다. 먼저 이 지형을 장악하는 쪽이 이긴다.

비서가 노크했다.

"대표님. 강현준 대표이사께서 오셨습니다."

박정우는 매직펜 뚜껑을 닫았다.

"들어오시게 해."

문이 열렸다. 강현준이 들어왔다. 정장 차림이었지만 넥타이가 느슨했다. 눈 밑이 어두웠다.

두 사람은 악수했다. 짧고 단단한 악수였다.

"앉으시죠."

강현준은 앉았다. 화이트보드를 잠깐 바라봤다. 특유재산. 기여도. 기업가치. 세 단어.

"얼마나 걸립니까."

박정우는 정직하게 답했다.

"2년. 빠르면 1년 반. 이 사건은 기업가치 감정에만 6개월 이상 걸립니다. 상대가 이수현이면 더 길어질 수 있어요."

"이수현."

강현준이 이름을 되뇌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그 이름이 붙은 판결문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경영권은 지킬 수 있습니까."

박정우가 잠깐 멈췄다. 0.5초의 멈춤. 강현준은 그 0.5초를 놓치지 않았다.

"그게 가장 큰 변수입니다." 박정우가 천천히 말했다. "재산분할이 지분 현물로 결정되면, 서윤아 씨가 실제 주주가 됩니다. 그때부터는 법정 밖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강현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았다. 광화문 광장이 보였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회사를 잃으면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졌다.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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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07:43 · 서윤아의 아파트 — 서울 용산구

불을 켜지 않았다.

서윤아는 소파에 앉아 어두운 거실을 바라보았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는 감각이 없었다. 핸드백은 현관에 그대로 있었다. 코트도 벗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언론사였다. 다섯 번째였다. 끊었다.

창밖으로 서울이 빛나고 있었다. 남산 타워. 한강 다리의 불빛. 저 빛들 중 어느 것이 현준이 지금 보고 있는 빛일까. 그리고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원망하겠지. 배신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배신한 건 내가 아니다. 23년을 같이 있었는데 내 이름 석 자가 지워지는 것을, 배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2002년이 떠올랐다. 성수동 반지하 오피스텔. 천장에 물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겨울엔 보일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현준이 코드를 짜는 동안 자신은 사업계획서를 썼다. 새벽 세 시에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웃었다.

"이거 진짜 되면 나랑 반반이야, 윤아야."

현준이 했던 말이었다. 반반. 농담처럼 했던 말이었지만, 서윤아는 그 말을 믿었다. 이십 년 넘게, 그 말을.

그리고 그 말이 오늘, 소장 한 장이 됐다.

서윤아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났다. 조용히. 소리 없이.

왕국은 여전히 저 바깥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왕국을 함께 지은 사람은, 이제 왕국의 바깥에 앉아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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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 2화: 창업의 계절

2002년 성수동. 스물네 살의 강현준과 스물두 살의 서윤아가 처음 만났다. 아무것도 없었다. 열정만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여도 충분했던 계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