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균열

왕국 이후 — Episode 03 게임의 탄생

그살장 2026. 7. 2. 17:38
왕국 이후 — 3화: 게임의 탄생
왕국 이후 — Episode 03

게임의 탄생

코드는 한 사람이 짰지만, 게임은 두 사람이 만들었다.

장르: 법정 스릴러 / 비즈니스 드라마 약 6,300자
오전 10:00 · 여의도 법무법인 이수 회의실

이수현은 책상 위에 박스 세 개를 올려놓았다.

서윤아가 다니던 시절의 자료였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회사가 아직 법인 등록도 안 되어 있던 시절부터, 크로스파이어급 첫 흥행작이 나오기까지의 기록들이었다. 메일 출력본, 회의 메모, 초기 기획서 사본. 서윤아가 이십 년 가까이 개인 클라우드에 흩어 보관해온 것들을 모은 결과였다.

"이걸 다 가지고 계셨어요?"

이수현의 질문에 서윤아는 옅게 웃었다.

"버릴 생각을 못 했어요. 그땐 우리 회사의 역사였으니까. 제 역사이기도 했고요."

이수현은 박스 하나를 열었다. 빛바랜 A4 용지 더미였다. 맨 위 파일에 손으로 쓴 제목이 보였다.

프로젝트명: 크로스로드 (가칭) — 기획 회의록 #1

날짜는 2003년 4월 12일. 참석자란에 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현준, 서윤아.

이게 시작점이다. 법인도, 투자자도, 사무실도 없던 시절. 여기서부터 35조 원이 자랐다.

이수현은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 ✦ ✦
회상 — 2003년 4월 · 성수동 반지하 오피스텔
[ 23년 전 ]

"FPS로 가자."

강현준이 화이트보드 앞에서 말했다. 보드에는 게임 장르 목록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다른 것들은 다 줄이 그어져 있고, FPS만 남아 있었다.

"FPS는 이미 레드오션이야. 카운터스트라이크 있잖아."

서윤아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녀 앞에는 시장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PC방 점유율 그래프, 게임 장르별 매출 통계.

"레드오션이니까 기회가 있는 거야. 사람이 많이 하는 데 작은 차이만 만들면 돼." "무슨 차이?"

강현준이 마커를 내려놓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무료. 우리는 무료로 가자."

서윤아가 고개를 들었다.

"무료면 어떻게 돈 벌어?"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난 게임만 만들 줄 알아."

서윤아는 잠깐 현준을 노려봤다. 그러다 노트북을 다시 들여다봤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이템. 무료로 플레이하게 하고, 캐릭터 꾸미기나 무기 스킨을 팔면 돼. 중국에서 비슷한 모델이 먹히고 있어."

강현준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거다."

그는 다시 일어나 화이트보드로 갔다. FPS 옆에 크게 썼다.

F2P + 아이템 과금 + 중국 우선 출시

서윤아는 그 글씨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노트에도 똑같이 옮겨 적었다. 그 옆에 작게 한 줄을 더 썼다.

(이거 내가 낸 아이디어. 잊지 말 것)

── 현재로 ──
오전 10:47 · 여의도 법무법인 이수 회의실

이수현은 같은 페이지를 두 번 읽었다.

증거자료 #07
프로젝트 회의록 #1 (2003.04.12) 발췌

기재 내용: "F2P + 아이템 과금 모델 채택. 中시장 우선 출시 전략. (서윤아 제안)"
작성자 필적: 강현준 (자필 확인 필요)
참고: 본 모델은 이후 '크로스로드' 흥행의 핵심 수익 구조로 발전, 회사 매출의 약 70%를 차지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원형이 됨.

"이거 강현준 대표 자필인가요?"

서윤아가 회의록을 들여다봤다.

"맞아요. 회의록은 항상 현준이가 손으로 썼어요. 저는 말만 했고."

이수현은 회의록을 비닐 파일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게 결정적입니다. 사업 모델 자체를, 본인 손으로, 서윤아 씨 제안이라고 명시했어요. 이건 단순 보조 업무가 아니라 핵심 의사결정 참여의 증거예요."

박정우는 이걸 모를까. 아니, 알았을 거다. 그래서 강현준이 그렇게 불안한 얼굴을 했겠지.

"또 있어요." 서윤아가 다른 박스를 가리켰다. "이거보다 더 한 것도."

✦ ✦ ✦
오후 02:30 · 광화문 법무법인 JW 박정우 집무실

강현준은 박정우 앞에서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수현 측에서 정보 공개 요청을 넣었습니다. 2003년부터 2007년 사이 개발 관련 회의록, 메일, 기획 문서 전부."

박정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신중했다.

"그게 왜 문제입니까. 우리 자료는 우리한테 있는 거 아닙니까."

"문제는 우리 자료가 아니라, 서윤아 씨 쪽이 가진 자료입니다."

강현준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박정우는 태블릿을 내밀었다. 회의록 사본 사진이 떠 있었다.

"본인 자필 맞으십니까?"

강현준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손글씨가 보였다. 누구의 글씨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이었다. 23년 전, 더 거칠고 더 급했던 손글씨.

"F2P + 아이템 과금 + 중국 우선 출시 (서윤아 제안)"

강현준은 한참 말이 없었다.

기억난다. 그날. 화이트보드 앞에서 윤아가 한 말. 그게 우리 첫 작품의 뼈대가 됐다. 그걸 내가, 내 손으로, 적어놨었구나.

"대표님." 박정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게 인정되면, 단순 배우자 기여가 아니라 핵심 사업 모델 설계자로서의 기여가 인정될 수 있습니다. 기여도 산정 비율이 크게 올라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박정우는 잠깐 망설였다. 변호사로서 해야 할 말과, 인간적으로 하기 싫은 말 사이에서.

"이 자료의 신빙성을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작성 경위, 정확한 발언자, 회의록의 법적 효력. 모두 다툴 겁니다."

강현준은 태블릿 화면을 다시 봤다. 자신의 손글씨. 자신이 직접 인정했던 사실. 그것을 이제 와서 부정해야 한다는 것.

"...그게 최선입니까."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강현준은 눈을 감았다. 오래.

내 손으로 쓴 걸, 내 손으로 부정해야 한다. 변호사들이 말하는 '전략'이라는 게 결국 이런 거구나.
✦ ✦ ✦
회상 — 2003년 9월 · 성수동, 첫 알파 빌드의 밤
[ 23년 전 ]

새벽 세 시였다. 첫 플레이 가능한 빌드가 컴파일됐다.

강현준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면에 캐릭터가 등장했다. 어설픈 그래픽, 깨진 텍스처, 그래도 움직였다. 총을 쏘면 반동이 일어났다. 적이 쓰러졌다.

"된다."

현준이 중얼거렸다. 서윤아가 옆에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게 우리가 만든 거야?" "어. 됐어. 진짜 됐어."

두 사람은 한참 화면만 바라봤다. 좁은 오피스텔, 깨진 의자, 식어버린 컵라면 국물. 그 모든 초라함 속에서, 화면 안의 캐릭터만은 선명했다.

"이거 진짜 출시되면..."

서윤아가 말끝을 흐렸다. 현준이 그녀를 봤다.

"되면?" "... 아니야. 일단 버그부터 잡자."

서윤아는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QA 시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버그 하나하나를 직접 찾아 기록했다. 그 기록이 나중에 회사의 첫 QA 프로세스가 됐다는 것을, 그때는 둘 다 알지 못했다.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들지 않았다. 잠들 수가 없었다.

── 현재로 ──
오후 06:00 · 여의도 법무법인 이수 회의실

이수현은 박스 세 개를 모두 정리한 뒤, 서윤아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단순 배우자 보조가 아니라, 공동 기획자 수준의 기여를 입증할 수 있어요."

서윤아는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들을 바라봤다. 23년 전의 자신의 글씨, 23년 전의 현준의 글씨. 그 시절의 두 사람이 거기 있었다.

증거 자료 확보 현황 — 1차 정리
회의록 (자필)14건 확보
기획 초안 메모22건 확보
QA / 버그 기록9건 확보
핵심 증거증거자료 #07 (사업 모델 자필 인정문)
예상 영향기여도 산정 비율 상향 가능성 ↑

"변호사님." 서윤아가 조용히 말했다. "이걸로 이긴다고 해도... 뭔가 이상해요."

"어떤 점이요?"

"그 사람이 직접 쓴 글씨로, 그 사람을 공격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같이 만든 걸, 서로 빼앗는 증거로 쓰는 거잖아요."

이수현은 잠깐 말을 멈췄다. 14년 차 변호사로서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매번, 똑같이 답해왔다.

"그게 이혼 소송이에요. 함께 만든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가리는 일."

서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긴다는 게 슬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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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 4화: 중국의 금맥

2007년, 첫 작품이 중국에서 폭발적으로 성공한다. 회사의 운명이 바뀐 순간. 그러나 그 성공의 한가운데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