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균열

왕국 이후 — Episode 02

그살장 2026. 6. 30. 09:42
왕국 이후 — 2화: 창업의 계절
왕국 이후 — Episode 02

창업의 계절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 가장 뜨거웠다는 것을, 우리는 왜 나중에야 안다.

장르: 법정 스릴러 / 비즈니스 드라마 약 6,400자
새벽 02:11 · 용산구 서윤아의 아파트

잠이 오지 않았다.

서윤아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보았다. 핸드폰 화면이 꺼져 있었다. 뉴스 알림을 모두 껐다. 오후 내내 쏟아졌다. 포털 메인에 이름이 올라갔고, 댓글이 쌓였고, 누군가의 사생활이 읽혔다.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고 기억이 왔다.

언제나 그랬다. 가장 지쳤을 때, 뇌는 가장 먼 곳으로 도망쳤다. 2002년. 성수동. 스물두 살.

── 2002년 11월, 성수동 ──
회상 — 2002년 11월 · 성수동 반지하 오피스텔
[ 23년 전 ]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세 번 두드렸다. 그래도 없었다.

서윤아는 손잡이를 돌려봤다. 잠겨 있지 않았다. 열었다.

오피스텔 안은 어두웠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고, 좁은 공간에 책상 두 개가 마주 놓여 있었다. 한쪽 책상 위에 모니터 두 대. 다른 쪽 책상 위에 기획서 더미.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자고 있는 남자 하나.

강현준이었다. 키보드 위에 이마를 대고, 코를 골고 있었다.

서윤아는 문을 닫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빈 컵라면 세 개. 에너지 음료 캔 두 개. 구겨진 A4 용지들. 모니터 화면에는 코드가 가득했다. 스크롤을 멈춘 채로, 그대로 잠들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편의점 봉투를 꺼냈다. 김밥 두 줄, 따뜻한 캔 커피 두 개.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자신의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제목을 썼다.

사업계획서 v0.4 — 중국 시장 진입 전략안

현준이 코드를 짜는 동안 자신은 시장을 분석했다. 분업이었다. 계약도 없고, 주식도 없고, 월급도 없는 분업이었다. 그냥, 둘 다 이게 될 것 같아서 하는 일이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언제 왔어?"

현준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서윤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두 시간 됐어. 코 골더라." "내가?" "응. 크게."

현준은 뒤통수를 긁었다. 책상 모서리의 편의점 봉투를 발견했다. 김밥을 하나 집어들고, 포장을 뜯으면서 모니터를 켰다.

"중국 파트너 미팅 준비는?" "지금 하고 있잖아." "혼자?" "둘이. 네가 코드 짜는 동안 내가 전략 짜는 거잖아."

현준이 잠깐 멈췄다. 서윤아 쪽을 봤다. 그녀는 여전히 노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야, 윤아야." "왜." "이거 진짜 되면 나랑 반반이야."

서윤아는 펜을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현준은 김밥을 입에 물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반반이 뭐가 반반이야." "말 그대로. 반. 반." "코드는 네가 짜잖아." "시장은 네가 읽잖아. 나 중국어 못해. 계약서 협상 누가 해. 투자자 미팅 누가 해. 야, 솔직히 사업에서 코드가 다냐."

서윤아는 잠깐 현준을 바라봤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김밥을 씹으면서.

그녀는 다시 노트로 눈을 내렸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알았어." "뭐가 알았어?" "반반."

창밖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반지하 창문으로 보이는 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뿐이었다. 하얀 눈이 검은 아스팔트 위에 내렸다 녹았다 했다. 두 사람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의 화면을 보았다.

그것이 그들이 맺은 첫 번째 계약이었다.

── 현재로 ──
새벽 03:40 · 용산구 서윤아의 아파트

서윤아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천장.

반반. 그 말 한마디를 나는 이십 년 넘게 믿었다. 철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 말을 믿었던 내가 맞고, 지금 그 말을 부정하는 그가 틀린 걸까.

그녀는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물을 한 컵 마셨다. 창밖으로 한강이 멀리 보였다. 새벽 한강은 검었다. 불빛들이 수면 위에 흔들렸다.

핸드폰을 들었다. 이수현 변호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새벽이었지만, 이수현이라면 깨어 있을 것 같았다.

서윤아 → 이수현 · 03:41
변호사님, 잠 못 자다가 문자 드려요. 한 가지 여쭤보고 싶어요.
구두 약속도 증거가 됩니까. 서면 계약이 아니라
말로 한 약속. 23년 전에 한 말.

3분이 지났다. 답장이 왔다.

이수현 → 서윤아 · 03:44
그 약속을 기억하는 제3자가 있습니까.
내일 사무실에서 얘기하죠.
지금은 주무세요.

서윤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제3자.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성수동 오피스텔. 그날 거기 있던 사람은 둘뿐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고,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건 나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할 것이다. 혹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 ✦ ✦
새벽 04:05 · 삼성동 넥스트엔진 본사 37층

불이 켜진 층은 37층뿐이었다.

강현준은 퇴근하지 않았다. 소파에 잠깐 누웠다 일어났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게 아니라,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잠들면 꿈을 꿀 것이고, 꿈에서 무엇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책상으로 돌아왔다. 서랍을 열었다. 아까 집어넣은 액자를 꺼냈다.

2002년. 중국 선전의 어느 호텔 로비. 첫 해외 계약 미팅을 마치고 나온 직후였다. 누군가가 찍어준 사진. 현준과 윤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시절이었지만,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강현준은 사진을 오래 들여다봤다.

네가 없었다면 그 계약은 없었다. 그건 안다. 중국어 협상을 나 혼자 했다면 계약서 싸인도 못 받고 나왔을 거다. 네가 그 자리에서 협상 조건을 세 번 뒤집었고, 상대방 팀장을 웃게 만들었다. 나는 그 옆에서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분이 되는가. 그게 수조 원이 되는가. 나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모르겠다.

그는 액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랍에 다시 넣지 않았다.

창밖 서울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남산 능선 너머로 하늘이 짙은 남색에서 회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새벽 네 시의 서울.

강현준은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켰다. 일을 해야 했다. 해야 할 일이 없으면 다른 생각이 들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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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 2002년 12월 · 선전, 중국 파트너사 사무실
[ 23년 전 — 강현준의 기억 ]

협상 테이블은 길었다. 상대방은 다섯 명이었다. 우리는 둘이었다.

강현준은 노트북 화면 위로 눈을 들었다. 중국어가 빠르게 오갔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숫자뿐이었다. 퍼센트. 달러. 기간.

서윤아가 말하고 있었다. 유창하지 않은 중국어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잘못된 발음도, 더듬거리는 문장도, 그녀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상대방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서윤아는 다시 말했다. 숫자를 종이에 써서 밀었다. 상대방이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계약서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서윤아가 사인을 마치고 펜을 내렸다. 강현준 쪽으로 펜을 밀었다. 그는 받아서 사인했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현준이 윤아의 팔을 잡았다.

"야. 마지막에 숫자 바꾼 거 뭐야." "로열티율 2퍼센트 낮췄어." "어떻게?" "팀장이 골프 좋아한다고 명함에 써놓길래. 한국에서 라운딩 주선해줄 수 있다고 했어."

강현준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골프장 없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면 되잖아. 일단 계약 따고."

서윤아가 태연하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현준은 그 옆에서 피식 웃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선전의 12월은 한국보다 따뜻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시장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맥주를 마셨다. 플라스틱 의자, 시멘트 바닥, 형광등 하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 잘 될 것 같아?"

현준이 물었다. 서윤아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돼야 되지." "그게 답이야?" "응. 안 되면 어떡하게. 이미 다 걸었는데."

현준은 웃으며 맥주를 들었다. 서윤아도 들었다. 부딪혔다.

그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플라스틱 컵이 부딪히는 가볍고 얕은 소리.

── 현재로 ──
오전 06:30 · 서울 전역

해가 떴다.

서윤아는 창가에 서 있었다. 한강 위로 아침 빛이 깔렸다. 잠은 결국 오지 않았다. 얼굴을 씻고, 옷을 입었다. 이수현 변호사 사무실로 가야 했다.

37층에서는 강현준이 아직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 위에는 기업 구조 검토 자료가 열려 있었다. 읽고 있었는지, 멍하니 있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가 뜨는 같은 서울에 있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거 진짜 되면 나랑 반반이야."
— 강현준, 2002년 11월, 성수동

그 말은 공중 어딘가에 떠 있었다. 법정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계약서에도, 이메일에도, 회의록에도 없었다. 두 사람의 기억 속에만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기억을 다르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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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 3화: 게임의 탄생

서윤아의 변호인단이 처음으로 꺼낸 파일. 2003년 초, 넥스트엔진의 첫 작품 개발 기록. 여기서 그녀의 이름이 몇 개나 등장하는가. 그리고 강현준 측은 왜 그 파일 하나를 가장 두려워하는가.